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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글

유희경 ㅡ 지옥 지옥 - 유희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히 흘러가는 개천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었다 우산을 쓴 내가 그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개천가에, 개천가에 긴 새가 서 있었다 걸음을 멈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보았다 긴 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편했기 때문에 나는 왼쪽 어깨에 기대 놓았던 우산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면서 저것은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날개도 부리도 없는 그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오른편에 둔 우산처럼 젖어가는 나는,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그러므로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이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비를 받아내고 있는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나는 저것은 새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에 잠겨 있고 난데없이 이건 또 어떤 지옥인가 싶었다 - 『우리에게 잠시 신..
레질리먼스(수정중) 사람들은 네 여동생이 스큅이고, 너희 가족이 그 사실을 너무 치욕스럽게 여겨서 그 애를 밖으로 내보지 않는다고 떠들어대. 너희 어머니가 엄청나게 자부심이 강한, 얼음장같은 여자여서 자기의 백치같은 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지하실에 가둬버렸다더군. 백셧 고모님께서 언젠가 흘리듯이 말씀하셨었지, 너희 어머니가 어떻게 옆집에 이사 온 것을 환영하는 노파의 눈 앞에서 문을 무례하게 닫아버렸었는지 얘기하셨던 기억이 나. 그리고 너와 너의 많이 멍청하고 무례한 남동생은 그건 사실이 아니랍니다, 그저 아리아나는 몸이 많이 약한 선량한 아이일 뿐이예요, 몸이 많이 약할뿐. 이라고 앵무새처럼 읊어대지. 멍청한 애송이인 애버포스에 비하면 모두의 총명한 귀염둥이였던, 흠집하나 없는 너의 세련되고 선량한 태도는 이 소..
오라, 죽음이여 한 때 죽음의 지배자를 꿈꿨던 소년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노인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네가 영원히 모르는 것이 있다는 조롱과 함께 ㅡ그 순간은 평생을 아무도 모르는 비밀에 괴로워하고 수만번 무너져내리며 구원을 갈구하던 다른 소년이 올렸던 기도의 조금은 늦었지만 완전한 응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나는 꿈을 꾼다 어느 여름날의 끝으로 돌아간 나는 계속 달려야한다 안돼 겔러트, 저 문을 열지마. 함께 떠나자고 얘기하지마. 꿈의 끝에서 늘 사자는 어린 소녀의 파리해진 손을 잡고 말한다. 자 안녕, 이라고 말하렴. 그리고 모든 꿈은 깨어진다.